History of Islam in Korea

한국이슬람의 발자취

1. 초기의 한국-이슬람 관계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룩하기 60년 전, 아라비아 반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 무함맏의 선교가 시작되어 634년에는 전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시키고 세계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를 맞고 있었다. 
이어 642년에는 페르시아에, 651년에는 당에 이슬람이 전파되면서 멀리 이제 막 통일을 이룬 한반도와 접촉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무슬림들이 한반도와 접촉한 최초의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 (서력 661-935)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가 당과의 협력으로 통일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또한 그만큼이나 당나라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신라는 정치 경제 문화적 관게에서 광범위하게 고도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게다가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하여 당시 중국의 남동부지역에 커다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던 무슬림들은 지역적인 근접성을 이유로 바다 건너의 신라와 접촉할 가능성을 크게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능성이 구체화되어 역사에 기록된 것은 우선 신라 사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슬림 사가들에 의해서이다. 9세기 중엽 이븐 쿠르다드비에 의해 쓰여진 “키타브 알 마살릭 왈 마말릭”은 한반도에 무슬림 진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중국의 건너편 콴수를 가로지르는 곳에 많은 산들과 금이 풍부한 ‘신라’라고 불리는 나라가 있었다. 우연히 그곳에 갔던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혹되어 영구히 그곳에 정착하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건너에는 무엇이 있는 지 알 길이 없다.”

이상의 기록에서 추론되어지는 가정 중에 하나는 처용에 관련되는 것이다. 곧 처용이 무슬림 상인이었다는 설인데, 위의 기록과 삼국사기등에서 처용은 4명의 일행과 함께 외국에서 상륙하여 나머지는 사망하고 처용만이 생존한 실제인물이었다는 사실에 주의하여 처용의 무슬림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상의 이슬람측 기록과는 달리 한국측 기록에 나타난 무슬림들과의 최초 접촉시기는 11세기초 고려시대 초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 현종 15년 (1024년) 9월에 열라자(Al-Raza)등 100여명, 다음 해 하세라자(Hassan Raza) 등 100여명과 정종 6년 (1040년) 11월에 보나합(Barakah)등이 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9월에 Tashi라는 이방국에서 Hasan, Raza와 다른 수 백 여명의 사람들이 왔고 그들의 자국 생산품을 왕에게 바쳤다.”

이들은 대식(중국음으로는 Tashih로서 아랍어의 타-지르-상인-에서 유래한 당송시대의 음역)국에서 온 사람들로서 의심할 여지없이 전형적인 무슬림들이다. 대식이라는 명칭은 12세기에 들어와 회회(중국음으로는 Hui-Hui)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는 데 이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영향으로 이슬람교 명칭이 회교 또는 회회교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명칭이 오늘날 까지 우리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다. 한국이 이슬람 세계와의 최초의 접촉들은 이상과 같이 국제무역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무슬림들을 부르는 당시의 명칭 곧 대식으로도 음미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에 이슬람 종교와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는 여말선초인 13-14세기이다. 이는 고려가 몽골 원제국의 간섭을 받으면서 몽골관리와 함께 원 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중앙 아시아 계 무슬림들이 대거 고려로 몰려오면서 가능하였다. 이들 무슬림들은 고려에정착하여 그들만의 종교 민족적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한국사회에 이슬람 문화의 이식에 기여하였다. 수도 개성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공동체 내에는 예궁이라 불리는 이슬람 성원이 존재하였으며 Doro라 불리는 종교 지도자들은 이슬람의 법률과 관습에 의해 예배의식을 수행하기 위해 공동체에서 선출되었다. 때때로 무슬림 지도자들은 공식적인 궁중의식에 초대되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꾸란 암송이나 왕의 장수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아랍식 Dua-기도 와 같은 그들 고유의 종교의식들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 의식들이 그 어떤 주목할 만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라는 주장을 뒤바침할 만한 어떤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고려 여인과의 결혼이나 주위 한국인들과의 일상적 교류를 통해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문화적 핵심요소들이 한국 사회에 유포되고 있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결혼을 통한 접촉과 동화의 예는 흔히 오늘날 덕수 장씨의 시조로 일컬어 지는 회회인 삼가(Samga)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고려 충렬왕의 부인이 된 원 공주를 따라 1274년 한국에 온 시종들 중에서 아랍인(혹은 위구르인이라는 설도 있다) 삼가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고려에 와서 높은 벼슬에 올랐고, 한국 여인과 결혼해서 충렬왕에 의해 장순룡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결혼을 통해 한국 사회에 동화된 무슬림 장순룡은 덕수 장씨의 선조가 되었고 당시 이름은 1277년 왕명에 의해 바뀌어 지게 되었다. 지금도 덕수 장씨의 족보를 살펴보면 가문의 선조가 아랍에서 온 무슬림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이 가문의 후손들은 50.000명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그리고 삼가라는 인물의 출처에 관해 그가 아랍인이었는지 터키계 위구르 무슬림이었는지에 대해 의견들이 있다. 위구르 무슬림이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근거는 조선 초의 기록들에서 보이는 무슬림들의 궁중 의식 참여와 사역원의 외국어 시험 과목이 위구르어 였으며 공식 외국어로서의 위구르어가 교습되었음을 감안한 것이다.

많은 무슬림들이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당시 사회에 이슬람적 영향을 끼쳤다. 이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는 이슬람력(히즈라)의 도입과 사용의 흔적이다. 세종이 농업의 획기적 발전을 위해 역법을 정비하고자 했을 때 종래 중국의 역법은 낡고 오차가 심하여 우리 실정에 맞지 않아 중국에서 회회역법(이슬람력법)을 얻어 그 원리를 깨우쳐 새로운 여법을 완성하니 그것이 바로 순 태음력인 칠정산외편이다. 다시 말하면 칠정산외편은 세종이 완비한 한국식 이슬람력법인 셈이다. 
이 외에도 조선 초기의 과학기기 발명과 과학 서적 편찬에 관련된 많은 이슬람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이후 한반도와 이슬람의 교류관계는 급격히 냉각되고 만다. 이는 대체로 15세기 이후 유럽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도하는 지리상 발견시대로 접어들면서 지금까지 교량적 무역을 담당하던 아랍 무역권의 쇠퇴와 동북아시아의 정세 변동에 따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명의 건국에 따른 유교 사상의 부흥이 있었는 데 이와 함께 무슬림들의 상대적 역할 감소가 두드러졌다. 

한국과 중국과의 긴밀한 역사적 유대관계로 볼 때 이같은 중국 대륙의 변화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쳐 1427년 유교주의 이념에 따라 이질적 문화요소에 대한 일대 소탕이 이루어 졌고 여기서 무슬림들의 활동은 상당히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이어 중국에 등장한 청조의 무슬림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 그리고 지리상의 발견 이후 동아시아에서의 유럽 해상세력이 무슬림 세력을 압도하는 국제 정치 환경의 변화도 한반도에서의 무슬림들의 고립화와 단절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절연의 시기는 20세기 초의 개화의 물결이 일어날 때 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무슬림들과 한국인들이 재 접촉한 곳은 만주와 서울이다. 일제가 만주경영을 위하여 한국인들을 반 강제로 만주에 이주시킨 한국인의 수는 100만명에 달하였다. 이 중 몇몇 한국인들은 무슬림들과의 접촉하였는데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무슬림들과 접촉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추측이 불가능하다. 그 당시 만주에서 살면서 이슬람과 접촉했던 무함맏 윤두영, 하지 서브리 서정길, 하지 우마르 김진규 등은 당시에 많은 한국인들이 이슬람의 탄탄한 교리에 매료되어 새로 무슬림이 되었으며 만주에 많은 이슬람 성원들과 이슬람 공동체(움마)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1920년대 이 후 한국 동란에 이르기 까지 이슬람과 한국의 또다른 접촉은 러시아 볼세비키 정권의 억압으로부터 탈출한 터키계 러시아인들이 한국에 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들 무슬림들 중 200명 정도가 한국에 영구 정착하였다. 이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한국의 터키계 무슬림들은 곳곳에 흩어지게 된 것으로 보였다. 이들은 주로 상업과 만주-일본을 있는 역내 무역을 통하여 상당한 부를 축척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mahall-i Islamiye’라 불리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 안에서 그들 고유의 종교와 문화를 유지하며 살았다. 그리고 서울 시내 요충지에 민족학교와 이슬람 성원을 건립함은 물론 꾸란을 출판 배포하고 서울 홍제동 근처에 이슬람 묘지까지 확보하여 근대 한국 이슬람의 태동에 새로운 계기를 만들었다.



2. 이슬람의 한국전래와 근대 이슬람의 태동

1) 1950년대

오늘날 한국무슬림 공동체가 형성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950년의 한국 전쟁시 외국 무슬림 군인들의 참전이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가한 다국적 군가운데에는 이슬람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터키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여단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그들은 전선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군대로서 명성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후방에서는 ‘앙카라 학교’를 건립하고 전쟁고아의 양육과 교육에 헌신적인 모범을 보였다. 무슬림 군인들의 철저한 규율과 극한 상황속에서의 인도적인 대민봉사는 사령부주변의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터키 군인들에 대한 이러한 관심과 애착은 그들 문화의 바탕인 이슬람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심으로 발전하였다. 

이들 중 최초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시도한 사람은 당시 터키 제 6여단 사령부의 군 이맘(Imam)이었던 “압둘 가푸르 카라 이스마일-오울루(Abdulgafur Karaismailoglu)”로 그의 노력으로 한국 무슬림 제1세대가 형성되었다. 당시 윤리와 도덕의 말살을 당연시한 전쟁의 아픔을 경험한 한국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가치체계의 확립과 정신적 안주를 간절히 희구하였는데, 터키군인들의 이슬람 신앙에 바탕을 둔 윤리관과 도덕관, 그리고 인도주의는 한국인들을 감명시켰으며 그 결과 “압둘라 김유도”와 “우마르 김진규”등 한국 최초의 무슬림들이 탄생하였다.

1955년 9월 15일 김진규와 김유도는 “한국 이슬람 협회”를 결성하고 한국인의 의한 최초의 이슬람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협회는 1955년 10월 터키 군당국의 지원을 받아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에 야전용 천막 3동을 설치, 이를 임시성원과 사무실로 사용하였으며, 매주 ‘압둘 가푸르’이맘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여는 등, 이슬람의 이해와 확산에 노력하였다. 그 이듬해인 1956년 4월에는 동협회 산하에 “청진학원”을 설립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불우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중등교육과 이슬람 교리교육을 무료로 실시하였다. 이 학생들중 일부가 이슬람에 귀의하였는데, 당시 학원의 규모는 3학급 80여명에 이르렀다. 

초창기 한국무슬림들의 이러한 활동은 1956년 ‘압둘 가푸르’의 뒤를 이어 20대의 젊은 이맘 ‘주베이르 코치(Zubeyr Koch)’가 여단 사령부 군이맘으로 부임해오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의욕에 찬 ‘주베이르 코치’와 한국 무슬림들은 선교활동을 가속화하는 한편 터키 여단 사령부의 지원으로 이문동에 임시성원을 마련하였다. 이 대형 콘센트 막사에 미나렛을 올려 만든 이 성원은 한국 이슬람 근대사에 최초의 임시 이슬람 성원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역사적인 임시성원에는 ‘멘데레스’터키 수상을 비롯한 많은 이슬람국 지도자들이 다녀갔고 이 당시 입교자는 208명에 이르렀다.

2) 1960년대

한국 무슬림들은 1960년대에 들어와 조직적인 국내 선교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각 이슬람국가들과의 유대강화에도 적극성을 보이게 된다. 당시 협회 지도자인 ‘우마르 김진규’는 ‘사브리 서정길’을 대동하고 1959년 11월부터 약 1년간에 걸쳐 사우디, 파키스탄등의 이슬람 국가를 순방하며 한국 이슬람의 실정을 알리고 지원을 호소하였다. 

이들은 1960년 사우디 순방중, 성지순례에 참가함으로써 한국 무슬림 최초의 성지순례자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이슬람국 순방결과, 1961년 9월 말레이지아 상원의원 ‘우바이둘라(Ubaydullah)’를 단장으로 한 14명의 말레이지아 사절단이 내방하여 한국 이슬람의 실태를 직접 파악하였으며 그 결과 1962년 2월 현 서울 중앙성원 이맘’술래이만 이행래’를 비롯한 한국 무슬림 학생 11명이(여자 3명 포함) 6개월간 말레이지 “클랑 이슬람대학”에서 체계적인 이슬람 교육을 받고 귀국하였다.

그 후 1962년 11월 ‘압둘 라작(Abdul-Razzaq) 말레이지아 부수상 내외, 1963년 10월에는 ‘하지 노아(Haji Noah)’말레이지아 국회의장이 내방하여 한국 이슬람의 어려운 실정을 파악하고 귀국한 직후, 1963년 11월 말레이지아 수상 ‘압둘 라흐만(Abdul-Rahman)’으로부터 성원 건립기금으로 미화 33,000불이 지원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 이슬람교 협회”는 1964년 10월부터 서울 상도2동에 성원 건립용 부지를 확보하고 착공에 들어갔으나, 대규모 공사계획에 따른 후속 지원금 미확보와 누적된 부채로 인하여, 한국 최초의 성원건립의 꿈이 무산되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이후 협회는 더욱 가중된 재정난으로 주요 업무가 마비되고 의욕을 상실한 무슬림들이 하나 둘씩 협회를 떠나 새로운 이슬람 단체를 조직하였다. 


3. 한국 이슬람의 정착과 발전

1) 1965-1976


군소 이슬람 단체로 분열되어 침체기를 맞고 있던 이슬람교는 그 후 수차례의 통합을 시도한 끝에, 1965년 4월 ‘한국 이슬람교 중앙연합회’를 발족시켰고, 이 연합회가 오늘날 한국 유일의 이슬람 조직체로 발전한 ‘한국 이슬람교 중앙회’의 전신이다. 연합회는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임시성원과 사무실을 마련하고 선교활동을 재개하는 한편, 해외 이슬람 단체들과의 유대강화에도 힘썼다.

한국이슬람의 대부로 추앙되는 파키스탄의 종교지도자 ‘사이드 무함맏 자밀’ 파키스탄 “꾸란협회”회장이 내한한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그는 1966년 10월 내한하여 약 40일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이슬람선교와 국내무슬림 교육에 심혈을 기울렸다. 그는 그후에도 여러 차례 방한하여 한국 이슬람 발전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성원건립의 필요성을 절감한 한국 무슬림들은 1967년 1월 “하지 사브리 서정길”회장과 “오스만 김용선”섭외부장을 약 7개월간 이슬람국가에 파견하여 선교상 성원건립이 시급함을 호소하였다. 이에 1967년 3월 쿠웨이트 종교성 희사금 미화 14,000불을 포함 전세계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성금이 답지하였다. 같은 달 “한국 이슬람교 중앙연합회”는 문교부에 “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법인체 등록을 필함으로써 공인된 교단의 면모를 갖추었다. 

“술래이만 이화식”을 비롯한 “압둘 아지즈 김일조”, “핫지 사브리 서정길”, “무함마드 윤두영”, “유스프 윤형구”, “오스만 김용선”등이 이시기의 중견이사들로써 한국 이슬람 현대사에서 한국 이슬람의 정착과 발전에 공헌한 무슬림 지도자들이다.

1967년 6월 격월간지 “코리아 이슬람 헤럴드”를 한글과 영문으로 발간하여 한국무슬림들의 활동을 전세계 이슬람국가에 홍보함과 동시에 예배근행과 선교활동의 구심점이 될 성원건립 사업에 전력하였다. 1967년 10월 임시성원과 사무실을 서울시 용산구 남영동으로 이전한 연합회는 교리강좌를 통해 무슬림 배가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파키스탄, 이집트등의 이슬람 국가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무슬림지도자를 양성하였다. 동시에 이슬람 각국에 사절단을 보내, 본격적인 성원건립 추진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한국 무슬림들의 성원건립 소망은 1970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이 용산구 한남동 소재 시유지 1,500평을 중앙성원 건립용 부지로 하사함으로써 더욱 구체화되었다.

1970년 12월 부지가 확보되자 중앙성원 건립을 위한 모금사절단을 수차례 이슬람 제국에 파견시켰으며, 1976년 5월 21일 세계 17개 이슬람 국가로부터 장관 및 국회의원을 포함한 약 50여명의 종교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원 개원식이 거행됨으로써 한국 역사상 최초로 아랍 건축양식에 의한 돔식 건물인 서울 중앙성원이 건립되었다. 또한 개원기념 행사의 하나로 “소수 무슬림 국가에서의 이슬람 선교”라는 주제로 국제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2) 1976년 이후

한국 이슬람교는 서울 중앙성원 건립과 중동 이슬람국가의 건축붐을 타고 수많은 인력이 아랍-이슬람 국가로 진출함에 따라 이들에 대한 현지교육과 이슬람 교육이 본회에서 실시되었다. 그 결과 약 3,700명이던 무슬림들의 수가 거의 배로 증가하였다. 이로써 한국 이슬람 선교는 증흥기를 맞이하게 되고 각 이슬람 국가와 종교를 통한 유대관계가 한층 강화되었다. 

1976년 6월에는 선교의 일환으로 중앙성원 이슬람 센터에 “아랍어 연수원”이 개설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리비아로부터 한국에 파견된 외국인 선교요원과 함께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대상으로 아랍어와 이슬람 교리를 강의함으로써 일반인들이 이슬람세계와 이슬람을 이해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년 7월에는 “무슬림이 되는길”을 제1호로 17종에 이르는 이슬람 선교용 책자가 한글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들은 이슬람 지식의 습득과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후 계속된 출판사업으로 수많은 이슬람 서적이 번역 출판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무슬림 학자들에 의한 성꾸란의 한글 번역본이 나오기도 하였다. 또한 본회의 선교활동을 국내외에 홍보하기 위해 “무슬림 주보”(주간)와 “알이슬람(격월간)”이 발간되어 국내외에 배포되었다.

이러한 선교의 활성화와 함께 미래의 무슬림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전문적인 교육기관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1977년 5월 쿠웨이트 실업가이며 “무슬림 대외원조 위원회”:회장 ‘압둘라 알리 무타와’의 적극적인 제안과 지원에 따라, 우리나라에 이슬람 대학을 건립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모색되어, “이슬람 대학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 후 1979년 7월 사우디아라비아 내무장관인 “나이프”왕자가 본 회를 내방, 한국 이슬람 대학 건립 계획에 적극 찬성하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대학건립 기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함으로써 대학 건립 추진사업이 현실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2차 석유위기를 맞아 1979년 10월 술래이만 이화식 이사장을 단장으로 한 순례사절단이 사우디 종교계 인사를 접촉하여 한국의 석유공급을 호소하였고 교단의 끈질긴 노력에 부응하여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한국에 원유를 특별공급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어 1980년 5월에는 최규하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여 양국 공동성명에 한국 이슬람대학 설립을 합의하였고 이에 따라 경기도 용인에 13만평에 달하는 대학부지가 확보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1982년 3월에 대학 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한국-사우디아라비아 공동위원회”가 정부차원에서 조직되어 구체적인 대학설립이 논의되었다. 동년 12월 3일과 6일에는 “한-사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어 대학설립 및 운영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안건이 협의되었는데 대학건립비와 운영비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지원키로 합의하였다.

한편, 한국이슬람교 연합회 산하에는 1977년 9월부터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학생회”가 자율적으로 조직되어 학생층을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학생회는 매주 3~4회의 교리연구 발표회를 통해 회원들의 이슬람 지식 함양은 물론, 각 대학에서 순회강연을 통해 이슬람의 보급에도 힘썼다. 또한 학생회는 연합회 및 주한 이슬람국 대사관들의 지원을 받아 “이슬람 문화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일반인들에게 이슬람과 아랍의 문화를 소개함과 동시에, 이슬람을 바르게 인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학생회의 이러한 활발한 선교활동은 이슬람 각국에도 알려져, 해외에서 개최되는 각종 청년 무슬림 회의나 캠프는 한국 무슬림 대표들이 초청되기도 하였다. 1983년부터는 “세계 무슬림 청년협의회(WAMY, World Assebly of Muslim Youth)”의 지원으로 매년 한국에서 WAMY캠프가 개최되었다. 이 캠프를 통해 무슬림 학생들간에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이슬람 생활화의 실천, 그리고 무슬림 석학들의 초청 강연을 통한 이슬람학 지식의 향상을 꾀하였다. 또 많은 수의 학생회원들이 이슬람 국가의 장학생으로 초청되어 유학함으로써, 많은 무슬림 인재가 양성되었다.

1970년대 중반 중동붐을 타고 해외로 진출한 한국인 기술자들이 이슬람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짐으로써 이들에 대한 선교활동을 절감한 “연합회”는 1978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업가 “쉐이크 우마르”의 지원으로 젯다에 이슬람 센터 겸 지회를 설치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된 한국인 기술자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편 결과 입교자가 8,000여명에 이르렀다. 또한 1979년 7월에는 쿠웨이트 종교성의 배려로 자하라 삼호주택 캠프내에 한국인 전용성원과 지회가 설치되어 술래이만 이행래이맘의 노력으로 쿠웨이트 전역의 한국인을 대상으로 이슬람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1984년 6월까지 약 3,000명이 이슬람교에 입교하였으며 1982년에는 인도네시아에도 지회가 설치되어 한국인 포교 선교 및 유학생 교류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76년 서울 중앙성원 개회를 계기로 지방의 선교도 서서히 활성화되었다. 1976년말에는 압둘 라힘 김명환을 중심으로 한 부산지역 무슬림들이 시내에 임시 예배실을 설치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1978년 4월에는 경기도 쌍용리 마을 주민들이 “압둘라 전득린”의 인도로 다수가 이슬람에 귀의하여 비닐 하우스로 임시 예배실을 마련하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농촌지역 선교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기도 하였다.

또한 1986년에는 압둘라쉬드 엽보섭을 중심으로 전주지역에도 이슬람의 씨앗이 뿌려져 지방선교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국에서의 이슬람의 확산은 이슬람 각국의 관심을 불러모아 리비아, 쿠웨이트, 이집트의 독지가들의 지원으로 이들 지역에 성원이 건립되었다. 또한 1986년 4월에는 후세인 유창식이 사재로 기독교 교회를 매입하여 이를 이슬람 성원으로 개조함으로써 서울 근교 안양에서의 선교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현재는 울산과 제주에도 임시 예배당이 설치되어 지역 선교 활성화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국 이슬람이 이땅에 뿌리내린지 40년만인 1995년말까지 한국에는 5개의 이슬람 성원과 6개의 이슬람 지회, 그리고 약 3만 4천명의 무슬림들이 알라의 복음에 충실하고 있다.

 
1955유엔군의 일환으로 6.25 한국동란에 참전한 터키군 이맘 “압둘 가푸르 카라이스마일오울루”에 의해 최초로 한국에 이슬람 전래됨1955.09“우마르 김진규”를 비롯한 초창기 한국 무슬림들에 의해 “한국 이슬람교 협회”결성1955.10터키 군당국의 지원으로 이문동에 야전용 천막 3동 설치, 임시 예배실과 사무실마련1956.04야전용 천막에 “청진학원”개설. 불우청소년들에게 중등교육과 이슬람 교리교육 실시1956.07“압둘 가푸르”의 뒤를 이어 “주베이르 코취”군 이맘으로 부임. 터키 군당국의 지원으로 이문동에 대형 콘세트 막사로 임시성원건립1958.04멘데레스”터키 수상 임시 성원 방문1959.11“우마르 김진규”, “사브리 서정길” 1년간 이슬람국가 순방, 한국이슬람 현황 소개1960사우디아라비아 방문중 한국인 최초로 성지순례 근행1961.09우바이둘라”를 단장으로 한 말레이지아 상원의원 사절단 14명, 한국이슬람 현황 파악차 내한1962.03한국 무슬림 학생 11명(여학생 3명 포함) 말레이지아의 “클랑 이슬람대학”에서 6개월간 이슬람연수1962.11말레이지아 부수상 “압둘 라작”부부 내방1963.10말레이지아 국회의장 “하지 노아”내방, 한국이슬람 지원약속1963.11말레이지아 수상 “퉁쿠 압둘 라흐만” 성원건립 기금으로 미화 33,000불 희사1964.10“한국 이슬람교 협회” 서울시 영등포구 상도동에 성원 신축부지 확보. 성원건립 착공, 계획 차질로 성원건립 실패, “한국이슬람교 협회”분산 해체  1965.04군소 이슬람 단체 통합 “한국이슬람교 중앙 연합회” 발족(회장 사브리 서정길, 사무총장-술레이만 이화식)1965.09서울시 용산구 원효로에 임시 예배실과 사무실 마련1966.10파키스탄 “꾸란협회”회잘 “사이드 무함마드 자밀”박사 내방, 40일간 체류하면서 선교활동(자밀박사는 그후 6차례 더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무슬림들을 지도하고 이슬람 세계에 한국이슬람 선교의 가능성을 인식시키는데 크게 기여)1967.01“사브리 서정길”회장과 “오스만 김용선”섭외부장, 약 7개월간 이슬람 각국 순방, 한국 이슬람현황 소개 및 성원 건립의 필요성 호소1967.03쿠웨이트 종교성, 성원 건립기금으로 미화 14,000불 희사1967.03문교부 장관 인가로 “재단법인 한국 이슬람교”발족, 이슬람 관계 재산관리 체제를 갖추고 성원건립기금 확보에 주력1967.06격월간지 “코리아 이슬람 헤럴드” 발간1967.10사무실과 임시 예배실을 용산구 남영동으로 확장 이전1970.09박정희 대통령 용산구 한남동 소재 시유지 1,500평을 성원건립 부지로 하사1970.10남영동으로부터 임시성원과 사무실을 한남동으로 이전1971.09한국 무슬림대표 6명, 일본을 공식 방문중인 사우디아라비아의 “화이잘”국왕을 일본 동경에서 알현하고 한국 이슬람 및 성원건립 기금 지원 요청1973.03“사브리 서정길”회장과 “압둘 아지즈 김일조”사무총장, 성원건립 기금 모금차 이슬람국가 순방1973.12“무함마드 윤두영”이맘을 대표로 성지순례단, 이슬람국을 순방, 성원건립기금 요청1974.06리비아의 “이슬람 선교회의”선교위원으로 파키스탄인 “화둘 까들 시디끼”와 “모히불 학 아리프”형제 파견 

 
 1974.10싱가폴주재 사우디아라비아 총영사 “다토 알-사고프”를 비롯한 이슬람 각국 지도자들의 적극 지원으로 서울 중앙성원 및 이슬람센터 기공식 거행1976.05전세계 이슬람 국가 지도자 51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중앙성원 및 이슬람센터 개원식 거행. 개원식 행사의 일환으로 “소수 무슬림 국가에서의 이슬람 선교”라는 주제로 국제 이슬람 세미나 개최1976.06서울 중앙성원 이슬람센터내에 “아랍어 연수원”개설1976.06세계적인 복싱왕 “무함마드 알리” 서울 중앙성원 내방1976.07선교용 책자 발간 착수. “무슬림이 되는 길”을 1호로 17종의 선교용 소책자를 발간. 국내 무슬림 및 비무슬림들에게 무료로 배포1976.08매년 라마단 성월(단식월)에 ‘따라위’특별예배를 위한 이맘과 꾸란 독경사 각 1명. 카타르 종교성에서 파견1976.12한국 제2의 도시 부산에 300여명의 무슬림들이 규합, 임시성원 개설1977.05쿠웨이트의 “대외원조위원회”회장 “압둘라 알리 알-무타와”내방. 한국 이슬람 대학 설립 방안 협의1977.05사우디 아라비아의 “다룰 이프타”. 선교위원으로 인도인 “쉐이크 사이드”형제 파견1977.09중앙 연합회 산하의 대학생 무슬림들이 자율적으로 무슬림 학생회 조직1977.10무슬림 자녀들의 이슬람 교육을 위한 “일요학교” 개설1977.11청년무슬림들의 심신단련을 위한 “무슬림 태권도장”개장1980.05최규하 전대통령의 사우디아라비아 공식방문시 한국이슬람 대학건립 지원 약속1980.07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경기도 용인에 국유지 430,000㎡(13만평)을 이슬람 대학 부지로 확보 

 
 1980.09세계 이슬람 각국 대표 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부산성원 준공식과 이슬람 대학 기공식 거행1981.01리비아 “이슬람 선교회의” 태국인 선교원 “무스파타”와 “압둘 가니”파견1981.06카타르 보이스카웃 대원 25명, 서오능 보이스카웃 훈련원에서 한국무슬림 회원학생들과 한달간 합동캠프 개최1981.06세계 각국 무슬림 지도자 21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기도 광주성원 개원식 거행1981.11세계 무슬림 석학 초청 강연회 개최(강사-쿠르쉬드 아흐마드’파키스탄’, 마흐디 아부드’모로코’, 이스마일 알-화루끼’미국’)1982.02리비아 ‘이슬람 선교회의’ 태국인 선교원 ‘압둘 라흐만’과 ‘압둘 라쉬드’파견1982.03한국 이슬람 대학 설립 한국-사우디 공동위원회 조직1982.06중앙성원 이슬람센터내에 무슬림 정육점 개설. 한국 및 외국 무슬림들에게 이슬람교리에 따른 “할랄”정육 공급1982.06인도네시아 지회설립(지회장-무함마드 길호철)1982.12이슬람 대학 설립을 위한 한국-사우디 공동위원회, 2회(12/3, 12/6)에 걸쳐 회의개최1983.04경기도 용인 이슬람 대학부지에서 제1회 “무슬림 움마 수련대회”개최
(이 수련대회는 그 후 8월까지 16회에 걸쳐 매 주말마다 실시되어 무슬림 상호간의 이슬람적 공동생활을 통해 형제애 함양) 1983.08“와미”(세계 무슬림 청년 협의회)의 후원으로 한국, 대만, 일본, 홍콩에서 약 100여명의 청년 무슬림들이 참가한 가운데, 동아시아지역 국제 캠프 개최1984.08“와미”의 지원으로 제1회 와미 국내 캠프 개최1985.02서울 중앙성원 이맘 “무함마드 윤두영”별세. 이슬람식 장례식 거행 

 
 1985.05“지아울 학” 파키스탄 대통령 서울 중앙성원 내방1985.06“이르샤드”방글라데쉬 대통령 서울 중앙성원 내방1985.07서울 및 각지회에서 60여명의 국내 무슬림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중앙성원에서 “국내 무슬림 지도자 연수”개최1985.08제2회 와미 국내 무슬림 캠프 실시1986.04안양 “라비타”성원 개원식1986.07“이슬람 회의기구( O.I.C)사무총장…. 한국 이슬람 현황 파악차 내방1986.08제3회 와미 국내 캠프 실시1986.08“아시안 게임”선수촌내에 임시성원 개원1986.11전주 “아부 바크르 알-시디끼”성원 개원식 거행. 이슬람이 한국에 전파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던 “주베이르 코치”이맘이 30년만에 한국을 방문. 전주성원 개원식에 참석1987.08제4회 와미 국내 무슬림 캠프 실시1988.05“무함마드 칸 쥬네조”파키스탄 수상, 서울 중앙성원 내방. 선교기금으로 미화 20,000불 희사1988.08제5회 와미 국내 무슬림 캠프 실시1988.09“서울 올림픽”선수촌내에 임시성원 개원1989.07제6회 와미 국내 캠프 실시 1989.09“이슬람 역사 바로잡기”의 일환으로 제1회 서울지역 중,고교 역사담당 초청이슬람 강연회 개최1990.10서울 중앙성원 이슬람센터 3층 증축착공식 거행1991.08전주성원 학생회 주최로 청년학생 무슬림캠프개최1991.08“라비타”사무총장 “압둘라 나시프”중앙성원 내방1991.11“세계 무슬림 학생연합회”(I.I.F.S.O)사무총장 “아흐맏 토톤지”박사의 지원으로 배월 1,3주 토요일 “하룻밤 집회”개최1992.01선교위원회 주최로 “할까 모임”구성. 매월 2,4주 토요일 꾸란과 이슬람 교리공부1993.06서울 중앙성원 이슬람센터 3층 증축, “마드라사”개설1994.06서울 중앙성원 개원 18주년을 기념하는 이슬람 세미나가 “이슬람과 한국 그리고 세계”라는 주제로 이슬람 중앙성원 회의실에서 개최1994.10서울 중앙성원 외벽 보수공사 시작1995.04주한 인도네시아인 협회의 지원으로 2명의 이슬람서예가 내한. 중앙성원 내부 및 외부전면을 장식1995.11“이슬람과 평화”라는 주제로 서울 중앙성원 회의실에서 이슬람 세미나 개최1996.11“이슬람과 다른이념”이라는 주제로 서울 중앙성원 회의실에서 이슬람 세미나 개최

1997.08이슬람 국제학술 대회 개최(주제:동아시아 역사내의 이슬람과 문화적 조화)1997.08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부설 ‘한국 이슬람 문화 연구소’ 개원1998.04한국 이슬람 발전 자문위원회 발족 (주한 이슬람국가 대사중심)1998.05한국무슬림 학생회, 주한 외국인 무슬림학생회와 연합1998.08WAMY 재정 지원 WAMY 캠프(제5차) 개최1998.10사우디아라비아 압둘라 황태자 내방2000.11사우디아라비아 술탄 이븐 압둘 아지즈 국방장관 방한, 마드라사 설립 지원2001.03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주지사, 살만 이븐 압둘 아지즈 알-사우드, 서울 중앙성원 방문2001.10서울 중앙성원에 ‘마드라사 술탄 빈 압둘 아지즈’개원2002.06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제주지회 개설2002.10경기도 안산 이슬람 선교센터 개원2003.05제1회 여성 무슬림 캠프 개최2004.08제11차 WAMY 캠프 개최2004.10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부평지회 마스짇 이슬람센터 개원2005.07한국 이슬람교 중앙회 거여동 이슬람센터 개원 (서울 송파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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