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바로보기

 

1.이슬람이 칼에 의해서 널리 퍼졌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아니다.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된 오해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꾸란에서 이르기를: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 속에서부터 구별 되니라” (꾸란 2:256) 

이 꾸란의 절에서 하나님은 진실과 거짓을 서로 구별되게 하셨으므로, 사람들은 전자 혹은 후자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어떤 종교를 믿도록 강요당할 수는 없다. 믿음이라는 매우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꾸란을 따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꾸란을 믿도록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선지자 모하마드(평화가 그분에게 깃들기를)조차도 다른 사람에게 무슬림이 되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다음의 말씀을 그에게 이르시기를: 

“주님의 뜻이 있었다면 지상에 있는 그들 모두가 믿음을 가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대는 강요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하느뇨.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는 믿지 않으며” (꾸란 10:99-100) 

하나님으로부터의 이 가르침은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을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혹은 그녀가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면, 그분은 모든 사람들을 믿는자로 만들 수도 있으시나,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선택하는 자유를 주신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도 힘으로 믿음을 강요당할 수 없다. 개인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이다. 어디에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가르침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감히 어떻게 진실히 꾸란을 따르는 자가 뒤에 돌아서는 다른 사람에게 그의 믿음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이와는 대조적으로, 꾸란은 꾸란을 따르는 자들에게 어떻게 사람들에게 진실한 신앙심을 불러일으킬 것인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지혜와 아름다운 설교로 모두를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되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그들을 맞으라” (꾸란 16:125) 

꾸란의 어느 부분이 칼끝을 사람들에게 들이대라고 말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도(평화가 그분에게 깃들기를)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시기를: 

“백성들에게 일러가로되 이것이 나의 길이라 나와 그리고 나를 따르는 백성들은 예증으로서 하나님을 경배하나이다” (꾸란 12:108) 

여기서 다시, 그러한 부름은 분명한 증거와 함께 확실한 앎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가르침들을 함께 제시하면서, 무슬림은 분명한 증거(즉 확실한 지식)로 이슬람을 보여주어야 함을 이해한다. 또한 지혜와 아름다운 설교를 사용해 믿음에 대한 증거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이성적으로 설득시켜야 한다. 어디에 감히 칼에 대한 언급이 나올 수 있는가? 

캐나다의 Junior 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슬람은 세계적으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이다”(The Junior Encyclopedia of Canada, Hurtig Publishers, Canada, 1990, Vol. 2. p. 396) 

이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오늘날 누가 다른 사람을 무슬림이 되라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 무슬림들은 눈에 뜨일 정도의 적극적인 설교에는 심지어 참여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이슬람의 품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이슬람은 이성적이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Huston Simth씨는 그의 책 “세계의 종교” 256쪽에서, 선지자 무하마드(평화가 그분에게 깃들기를)가 무슬림의 지배 아래에 있는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종교의 자유를 주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선지자는 그가 직접 규정한 문서에서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온갖 모욕과 무례함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했다; 또한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무슬림처럼 자유로이 그들의 종교를 일상생활에 실행에 옮길 수 있다”고 했다. (Huston Smith, Harper Collins의 The World’s religion(세계의 종교, 1991), 256쪽에서 인용). Smith씨는 무슬림들은 이 문서를 인류의 역사에서 첫 번째 양심의 자유를 인정한 첫 번째 장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또한 계승되는 모든 무슬림 국가에서도 당국의 방식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자, 이슬람이 칼에 의해서 전해졌는가? 이 대답을 비 무슬림인 Ira Zepp Jr의 책 “A Muslom Primer(무슬림 입문서)”에서 들어보자. ”이슬람이 `칼의 종교` 또는 ‘칼에 의해서 전해진 종교`로써 고정관념화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역사의 진실은 이슬람의 확장이 군사적 무력이 아니라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떤 경우에라도, 이슬람은 어느 누구에게라도 강요될 수 없다; 만일 shahadah(즉 이슬람의 선서)가 누군가에게 강요되었다면, 그것은 진실한 이슬람이 될 수 없다.“ (Ira Zepp의 A Muslim Primer(무슬림 입문서),1992, Wakefield Editions, US, 134쪽) 



2.이슬람교 개관

이슬람교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종교다.

서기 610년 예언자 무함마드(무하마드)가 천사 지브릴(차브리엘)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선교를 시작한 이래 아랍과 중앙아시아에서 광대한 세력을 구축했다.상대적으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전세계 1백84개국 13억여명의 신도를 거느린 세계 최대의 종교로 성장한 이슬람교가 우리나라와 최초로 접촉한 것은 통일신라시대. 고려 · 조선시대를 통해 우리나라 문화와 과학기술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이슬람교는 15세기 중엽부터 한반도에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50년대 한국전에 참전한 터키 군인들에 의해 전파되기 시작, 현대 한국 이슬람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질적인 문화권에서 전래된 외래종교인 까닭에 잘못 전해진 부분도 많았지만 한국의 이슬람교는 한국 사회와 융화를 꾀하며 꾸준한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3.알라(Allah)인가 알라신인가

매스컴이나 책 등 각종 글에서 이슬람교에 관한 내용을 접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알라신’이라는 명칭이다. 번역서의 경우에도 원문에는 알라(Allah)혹은 신(God)로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말 번역본에는 ‘알라신’으로 되어 있다. 그만큼 ‘알라신’이라는 명칭은 관행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고, 무슬림(이슬람교도)이 아닌 독자들은 그 호칭에 별다른 견해나 감흥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종교를 대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믿음(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그 종교를 올바르게 대하고 안다는, 혹은 더 나아가 공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슬람에 대해 무지했던 옛 서구인들이 마호메트(무함맏)가 기독교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에 입각해 마호메트교, 혹은 마호메트교도라는 그릇된 명칭을 만들어냈듯이, 이슬람교가 겪어야했던 왜곡과 질곡, 그리고 매도의 시간만큼이나 그 신앙의 대상(Allah) 역시 적절치 못한 호칭으로 우리 사회에서 거론되고 있다.

어원적 의미로 본 아랍어 단어 알라(Allah)는 정관사 알(Al)과 일라(ilah)가 결합된 단어이다. 아랍어에서 일라(ilah)는 위대하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예배와 경배를 받으며 복종받는 존재하는 뜻이다.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 일라(ilah)라고 불리워졌으며, 무한한 능력 즉 다른 존재를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일라(ilah)는 보이지 않는 것, 신비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영어의 ‘god’, 페르시아어의 ‘khuda’, 인도어의 ‘deva’, 라틴어의 ‘deus’, 한국어의 ‘하나님’ 혹은 ‘하느님’과 유사한 단어이다. 따라서 알라(Allah)라는 단어는 일견 영어의 the God와 유사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실제로 영어로 번역된 책들 중 일부가 알라(Allah)를 the God 로 옮기고 있다. 그러나 무슬림들에게 있어 알라(Allah)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the God를 훨씬 초월한다.

무슬림들의 첫번째 신앙고백은 ‘라 일라하 일랄라(La ilaha illallah)’로 시작된다. 이 고백의 의미는 ‘오직 하나이신 위대하신 분 이외에는 일라(ilah)가 없다’이다. 모든 것을 초월하여 그 위에 홀로 영원히 존재하는 절대적인 존재, 따라서 모든 피조물들의 경배와 찬양이 되어 마땅한 지고하신 분이 바로 ‘알라(Allah)’에 담긴 의미이다.

말하라, 하나님은 단 한분이시고, 영원하시며, 낳지도 낳아지지도 않으셨으니, 그분과 대등한 것 세상에 없노라. (알 이클라스, 꾸란 112장) 

그러므로 무슬림들은 God 나, Deus, khuda 등의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심오한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한다.

알라(Allah)가 이처럼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임을 생각해볼 때, 그렇다면 ‘알라신’은 어떠한가.

알라(Allah)가 일견 the God 와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알라신’이라는 표현은 동어반복의 오류를 범하는 명칭이다. 뿐만 아니라 무슨무슨신 이라는 명칭은 제우스신, 아폴론신, 시바신, 비슈누신 처럼 통상 다신교의 많은 신들을 지칭하는데 쓰인다. 비록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이 알라(Allah)라는 단어가 갖는 특수성과 의미를 고려한 서양의 저자들은 the God 대신 아랍어 단어 그대로 알라(Allah)를 사용했고 현재 많은 서양의 언어에서 알라(Allah)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로 이슬람에 무지했던 우리의 많은 작가나 기자들은 알라(Allah)를 마치 특정부족이 섬기는 하나의 신의 이름인양 그것을 ‘알라신’으로 옮기는 우를 범했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관행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알라(Allah)’라는 말이 갖는 깊은 의미와 음악성을 고려해 볼 때 전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알라신’이라는 단어가 무슬림들의 반감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알라(Allah)’라는 단어가 무슬림들에게 찬미와 깊은 존경,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반해, ‘알라신’은 무슬림들을 ‘특정 부족의 원시적 혹은 다신교적 신앙’의 소유자로 전락시킨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는 그대로 ‘알라’나 ‘하나님’으로 표기해야 하며, 그 외의 모든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더불어 이 홈페이지에 쓰인 ‘알라’와 ‘하나님’은 모두 동일한 개념으로 쓰이고 있음을 밝혀둔다.

(아스마 이은희) 


4. 이슬람인가 마호메트교인가

기독교나, 혹은 페르시아의 옛 종교 조로아스터교등의 명칭은 각기 사람의 이름(기독교는 기독(Christ의 음차)에서, 조로아스터교는 그 창시자 조로아스터에서)에서 유래되었다. 과거 우리 사회에서는 ‘기독교’라는 명칭과 더불어 ‘예수교’라는 명칭이 통용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 예수교라는 명칭이 기독교를 격하하는 듯한 어감을 준다 하여 기독교도들에 의해 배척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슬람교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민중서림에서 출판된 한 국어사전을 보면 이슬람은 “이슬람교도가 자기네 종교를 부르는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다.그렇다면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들은 이슬람을 뭐라고 부른다는 것인가.

이슬람의 어원적 의미는 복종과 순종, 그리고 평화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슬람 교리의 핵심이자 어쩌면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유일신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이 단어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또한 두번째 의미 ‘평화’란, 작게는 개인이나 가족, 공동체의 평화부터 크게는 전인류, 전 우주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은 언제나 이 쌀람(‘샬롬’과 어원이 같다)으로 인사를 주고 받는다.

이슬람 교리에 입각해 살펴보면 유일신(Allah, the God, 하나님, etc.)은 모든 것을 초월한 절대적인 존재이다.(글 ‘알라인가 알라신인가’ 참조). 따라서 무슬림이 하나님의 사도로서 동등하게 믿는 이브라힘(아브라함), 무사(모세), 이사(예수), 무함맏(마호메트) 등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그분의 뜻에 순종했던 사도이기에 깊은 존경을 드리는 것이지, 결고 그 사도들 자체가 신앙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성했던 이슬람세계와 오랜 역사에 걸쳐 대치해 온 서구 기독교 세계는 이슬람을 거친 사막 유목민들이 지닌 샤머니즘적인 종교인양 왜곡을 거듭해왔다. 이같은 왜곡과 매도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는 다른 글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이 글에서 우선 밝히고자 하는 것은, 이슬람은 ‘마호메트교’가 아니라 ‘이슬람’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마호메트(무함맏)는 하나님의 사도일 뿐, 그 분 자체가 신앙의 대상은 아니며, ‘유일한 신(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이슬람의 근원이자 본질임을 생각할 때, 마호메트교라는 명칭은 이슬람을 격하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슬람의 근원을 왜곡하는 명칭인 것이다. 따라서 이슬람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그 첫작업은 ‘이슬람’이라는 올바른 명칭의 사용과 그 인식으로부터 시작될 수 밖에 없다. 

(아스마 이은희) 


5. 이슬람이 일부다처를 조장하였는가

이슬람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 어떤 현상이나 제도, 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사람들의 편견이나 선입관은 대부분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과 그 사회제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상당부분 이슬람과 아랍, 혹은 이슬람과 그 지역을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데서 온다는 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슬람의 관습(혹은 제도)라고 생각하는 일부다처제는, 사실 이슬람의 일부사처가 아니라 인류의 오랜 역사에 걸쳐 거의 모든 곳에서 자행되어왔던 일부다처제이다.

이슬람에서 말하는 일부사처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1. 일부사처는 권장 사항도 아니고, 의무 사항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 꾸란에서는 일부일처를 최선으로 보고 있고 있으며 현재 무슬림 중 2%도 채 안되는 사람들만이 둘 이상의 부인과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무슬림이 일부다처를 할 수 있고 또 하려고 한다고 믿고 있으며 이것은 이슬람의 여성관을 왜곡하는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2. 일부사처는 전쟁뿐 아니라 그 외에도 까다로운 제약조건을 두고 있어, 그 내용과 원칙 측면에서 볼 때 남성의 성적 충족(축첩)을 위한 장치가 아닌,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라는 점. (성욕을 위해 일부다처를 행하는 것은 이슬람에서는 죄악시한다는 점. )

3. 어느 종교든, 어떤 사회이든 항상 법이나 제도를 잘못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차선책으로 제시하는 일부사처를 자신의 성적 욕구 충족을 위해 악용하는 일부 무슬림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특히 돈과 권력을 쥔 사람이 그런 경우가 많다. 그러나 종교를 가진 모든 사람이 그 가르침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에 해당되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이슬람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들이 과장되어 있고 잘못 알려져있으며 또한 부정적인 부분들만이 유난히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일부사처를 행할 수 있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전쟁이나 기타 재난 등으로 인해 남성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때 : 이슬람에서는 남녀 모두의 성욕을 합법적 절차를 통해 적절히 해소되어야할 것으로 본다. 따라서 사회 문란이나 사생아 출산 등을 초래할 수 있는 간음을 엄격히 금하고 있으므로 이같은 경우 일부일처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으므로 또다른 완충 장치가 필요하다.

첫번째 아내가 질병으로 인해 정상적인 부부관계 유지가 불가능한 경우.

첫번째 아내가 불임이나, 부부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아이를 원하는 경우

다른 어떤 여성이나 고아들을 돌보아주어야할 필요에 의해 결혼을 하는 경우 : 예를 들어, 94년에 이집트에서 이런 경우가 있었다. 한 학자가 자신의 은사가 사망을 하고 난 뒤 그 사모님과 자녀들이 물질적으로 딱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음을 알고 그들을 돕기 위해 그녀와 법적 결혼을 하여 자신이 돌보아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 있어 이미 혼인 중에 있는 부인들의 동의가 없이는 다른 부인을 맞이할 수 없으며, 이슬람에서 보장하는 여성의 권리로 인해 부인은 자신의 권리가 침해되고 무시당했다고 여겨질 때 이혼을 요구할 수 있다. 부인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중혼은 위법이다.

또한 둘 이상의 여성과 중혼을 한 경우 남성은 부인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완전히 동등한 대우와 처우를 해주어야한다. 그러나 이 동등한 대우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므로 꾸란에서는 한쪽에 치우친 여성들로 만들지 말라 는 말씀과 함께 일부일처가 최상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1부 4처는 엄격한 조건과 제한 설정으로 인해 사실상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행해지지 않는 하나의 완충장치에 불과한 것이나 일부 사람들은 이를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악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분명 이슬람에서 말하는 완충장치로서의 일부사처는 남성의 성욕 충족을 위한 축첩제가 아니며, 그같은 축첩제는 이슬람에서 엄금하고 있다.

이슬람의 모든 제도나 규정들은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하나만을 따로 떼어놓고 볼때에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도 그 컨텍스트 안에서는 이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 점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의 여러가지 규정들을 분리하여 곡해하거나 왜곡시키고 있는데 이점은 충분히 경계를 하여야 한다.

또한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슬람의 1부4처는 제도화된 장치가 아니라 특수한 상황하에만 엄격한 제약하에 행할 수 있는 ‘완충장치’이므로 일번적으로 쓰이는 ‘일부다처제’라는 단어는 이 글에서 사용하지 않는다. 

(싸나 박정순, 아스마 이은희) 



6.이슬람은 왜 돼지고기를 금하는가

1. 머 리 말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들은 흔히 “이슬람교도(무슬림)는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이러한 질문이 나오게 되는 까닭은 현대인은 복합적인 문화사회와 종교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과 또한 대부분이 이슬람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또 현대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슬람교도들이 이슬람을 그릇된 색채로 도장함으로써 빚어지는 심각한 오해 때문이기도 하다.

편견 없이 허심탄회하게 이슬람을 대하는 사람에게는 그 참뜻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슬람은 가장 과학적이고 이성적이며 실천적인 종교이다. 

이슬람은 교리의 실천가능성을 강조하며 단순히 마음의 믿음에만 그치는 것은 하등 실천성이 없는 것으로 본다. 예언자 무함마드(P.B.U.H)은 말하기를 “다만 믿는 것으로 그치고 이를 실천하지 않는 자는 이슬람에는 있을 수 없다고”하였다. 

무슬림이라면 자기의 신앙을 실천에 옮겨야하는 것이며 그것을 과학적으로 재현함으로써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들이 이슬람의 교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것이다.

이슬람교에 대한 교인과 교인 아닌 사람들 사이의 무지와 완고의 암우를 걷우게 하기 위하여 과학적이고 이지적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무슬림은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의학적, 도덕적 견지에서 다룬 중국 이슬람 지도자인 “하지 이브라힘 마천영”의(현 말레이지아에 살고 있음)글을 번역 출판하는 바이다.



2. 위생학과 순결성

이슬람교에서 돼지고기를 금식시키는 이유는 위생학적인 면과 인품의 순결을 지키도록 하기 위한 조처인 것이다.

우선 청결한 생활을 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이슬람을 알아보기로 하자.

첫째―이슬람은 영혼의 순수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을 양심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으나 “영혼의 순수성”은 양심과 구별된다.

둘째―이슬람은 과격하지 않은 운동을 가르치고 있다. “이슬람의 5주”의 하나인 예배는 가장 훌륭한 형태를 가춘 과격하지 않은 육체운동이다. (주:이슬람의 5주란―이슬람의 5대의무―즉 다섯가지 실천사항을 말한다. (1)”알라(하나님)외에 신은 없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라는 유일신 신앙의 고백을 하고 (2)예배 (3)회사 (4)단식 (5)순례를 한다.

과학은 위생학에는 힘을 기울이고 있으나 도의심의 향상이 되는 인생수양의 중요성은 이를 등한시 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질주의에만 주력하고 정신주의는 망각하고 있다. 물질주의와 인생수양의 향상―이 2가지 목적의 병행이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과학과 철학이 이를 등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임시적인 것이며 언젠가는 햇빛을 보게 되리라고 믿는다.

현재의 위생학은 피상적이고 물질주의적이다. ― 인간의 내재적 자질개발은 물질과 정신 양면에서 진행시켜야 한다.



3. 이슬람은 정서를 다듬어 준다.

어느 종교이든 다 그렇지만, 이슬람은 훌륭한 인격과 도덕에 많은 힘을 쓰고 있다. 이슬람은 성선설을 가르친다.

“사람의 선악은 생후 배워서, 죽 사회에 적응하면서 그 주의환경에 영향을 받아 선악이 가름 되며 태어날 그 당시만은 결코 선한 것이다.”라는 맹자의 사상은 이슬람과 견해를 같이 한다.

과거 중국 초등교과서에서 중국 어린이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가르친 것은 “인간은 결백하게 태어났으나 환경에 따라서 선하게 되기도 하고 악하게 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선악은 교육과 환경에 따라서 자라나는 것으로서 맹자의 가르침과 이슬람교에서의 이에 대한 차이점은 이슬람은 덕을 쌓는 방법과 선악을 행하지 않게 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있다.

인간에게는 식(食), 숙(宿), 성(性)의 3대욕망이 있다. 또한 행복, 노여움, 비애, 사랑, 공포, 증오, 허욕의 감정을 지닌 고등동물이기도 하다. 허욕은 소유욕의 본능에 의해서 생긴다. 

욕구불만은 시기심을 자아내고 시기심은 질투로 발전한다.―인간에게 생명이 있는 한 감정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므로 이슬람은 이 일곱 가지 감정의 소멸을 주장하지 않고 그 통솔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은 마치 차량의 모―터와 같은 것이어서 이것을 잘 운전함으로써 목적지로 몰고가는 것은 운전사에 달려 있다. 교육, 특히 종교 교육은 그 운전자의 역할과 같다.



4. 음식물의 선택

이슬람에서 돼지고기를 금하는 것은 물질주의적 교육의 제일보라 하겠다. 이 제일보는 결백한 인간성의 수양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깊이 이해시켜주는 방향으로 인간을 선도한다.

육체의 피는 생명의 흐름이며 먹는 음식이 피가 되는 것이므로 음식과 음료를 잘 선택하여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문화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음식 선택에 세심하다. 과거의 아프리카 미개인들은 식인종이었다. 

말레이시아 원주민과 북부 보르네오에도 음식 선택을 할 줄 모르는 인종이 있다. 그들은 뱀, 굼뱅이, 쥐 할 것 없이 손에 잡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먹는다. 소위 인도의 불가촉천민들도 음식을 선택하지 않고 아무것이나 먹는다. 

그러나 그들이 문화수준에 도달하면 음식을 골라먹기 시작한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인간은 문화수준이 높을수록 음식물을 골라 먹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슬람은 자연사한 동물의 고기와 소, 양, 닭을 막론하고 싸우다 죽은 동물의 고기를 먹지 않도록 금한다. 과학자들이 싸우다 죽은 동물의 피나 고기에 대하여 연구해본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슬림은 이런 고기를 먹지 말도록 교육 받아 왔다. 

왜냐하면 생리학적인 면에서 독이란 악의 요소가 응결되어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슬림은 또한 사자, 호랑이, 표범, 뱀, 고양이, 개, 쥐, 따위의 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런 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런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인간의 성격의 정화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은 음식물은 창자로 들어가서 배설물이 되기 전에 뇌를 포함한 신체 각 조직에 흡수되어 신진대사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의 성격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깨끗한 고기를 먹도록 가르치며 채식주의를 방지하지도 않고 권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고기를 먹을땐 골라 먹으라는 것이다.

현대의 돼지는 깨끗한 먹이로 기르고 있으므로 돼지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깨끗하고 영양분이 많은 먹이나 아무리 깨끗한 먹이로 길렀다 해도 돼지의 성질까지를 변경시킬 수는 없는 것이며 돼지는 역시 돼지일 뿐 나무처럼 접목을 해서 그 성질을 변경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5. 돼지의 습성

돼지는 성질이 게으르고, 햇빛을 싫어하고 투지가 없다. 돼지는 거의 무엇이든 닥치는데로 먹는다. 모든 육류 중에서 해로운 병균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돼지고기다. 

돼지고기는 또한 질병의 매개체이다. 돼지고기가 식용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6. 돼지고기에 대한 고대 중국의 견해

중국의 유명한 생명학자인「탕야쇼」는 “돼지는 죽는 순간에 공포심이 심장으로 들어가며, 짐승은 죽을 때 마지막 숨(호흡)이 담으로 들어간다.”고 여기 인용한 글은 공포심에 관한 것으로서 동물은 죽을 때 마지막 숨이 심장과 담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지적한 것인데 과학자들이 이것을 긍정하지 않을는지 모르겠으나 이 학자는 보통의 학자가 아니었다. 거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음에 틀림이 없다.

당나라 때의 “마오 순시”는 위대한 의학자였다. 재상벼슬을 마다하고 받지 않았으며 그의 사후 천년동안 그를 따를만한 사람이 없었던 위대한 의학자이자 위생학자로서 100세까지 살았다. “건강의 기록”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돼지고기는 묵은 병을 재발케 하고 류마치즘(신경통)과 해소병을 기른다”고 했다.

이분의 학설은 현대 과학자들도 시인하고 있다. 여기에 예를 든 것 외에도 돼지고기는 인체에 해롭다는 논증이 많이 있다.


7. 돼지고기에 대한 현대의 견해

돼지고기를 먹으면 기억력이 쇠퇴하고 머리 카락이 빠진다. 돼지고기는 대머리의 원인이 되고 기억력의 쇠퇴를 초래한다는 것은 현대과학이 규명한 바이다.

돼지고기를 파는 푸주간 사람들은 대개가 비대한 것을 볼 수 있는데 비대하다고 반드시 건강하다는 증거는 아니다.

이것은 항상 돼지고기를 만짐으로서 돼지고기가 전해오는 병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렌 쉐퍼드”(Dr. Glen Shepherd)는 1952년 5 월 31일자 “워싱톤 포스트지”에 실린 글에서 돼지고기를 먹는데서 오는 위험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미국과 캐나다의 6명중의 1명이 선모충병균을 보유하고 있는 돼지고기를 먹음으로서 근육에 병균을 보유하고 있다. 

이 병균 보유자들은 증세가 눈에 띄지는 않는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짧은 시일 내에 치료가 되지 않으며 때로는 생명을 잃는 수가 있고 병신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조심하지 않고 돼지고기를 먹는데서 오는 것이다. 이 병은 면역이 되지 않으며 치료법이 없다. 이 아주 조그마한 무서운 병균을 예방하는 항생제도 약도 주사도 없다. 오로지 예방만이 유일한 치료방법인 것이다.

성장한 선모충병균은 길이 1/8인치, 폭 1/400인치이다. 수명 40년으로 근육세포 사이에서 번식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병균이다. 이병에 감염된 돼지고기를 먹으면 그 병균도 함께 소화되어 세균으로 자  1마리가 1,500마리의 새끼를 낳아 2 ∼ 3주 후에 혈액으로 들어간다.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인다던가 불에 굽거나 해도 병균은 죽지 않는다.

도살장에서 잡아서 포장하면 깨끗하다고 생각하기 쉽겠으나 아무리 관이 검사를 잘한다 해도 병균을 보유한 돼지고기를 가려낼 수가 없는 것이다.

위의 전문가의 보고서에서 알 수 있듯이 선모충병균이 보유여부를 보증할 방법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일종의 도박행위이며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노릇이라 하겠다. 1967년 1월 “이슬람 리뷰지”(Islamic Review)에서 “모함맏 쟈퍼”(Dr. Mohd. Jaffer) 박사는 현대적 연구방법에 의해서 발견한 돼지고기가 보유하는 16가지의 해로운 병균을 열거한바 있었다. 

그가 1936년 “카이로”대학 의과대학을 방문했을 때 실험관 속에 담은 10피드나 되는 조충을 의과 과장이 내보이며 “이것은 중국산이오”하므로 “쟈퍼”박사는 당혹 하면서 “왜 하필이면 중국산을 특정참고로 하는 

것이오”하고 반문하니 그 대답은 이러했다. 

― “중국은 세계에서 돼지고기를 가장 많이 먹는 나라이며 조충 환자가 세계에서 돼지고기를 가장 많이 먹는 나라이며 조충 환자가 세계에서 제일 많으오. 돼지가 감병의 매개체인 선모충과 장균이 가장 많은 곳도 중국이오. 그래서 딴나라에서는 회충표본을 중국에서 사오는 것입니다.”


8. 유럽인과 돼지고기

독일 사람은 그렇지도 않지만 구라파인, 미국인, 호주인은 돼지고기를 잘 먹지 않고 쇠고기를 많이 먹는다. 이태리는 “로마 카톨릭 국가”라 할 수 있는데 냉장시설이 생기기전의 현대에는 5월∼8월 사이의 돼지고기 판매를 금했었다.

다른 구라파 국가에서도 그랬던 일이 있었고, 불란서는 이 기간동안 굴을 먹지 못하게 하고있다. 영국도 돼지고기에 대해서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사람들은 「R」자가 끼지 않은 달에는 돼지고기를 사고 팔지 못하게 제도를 만든 모양이어서, 5월(May), 6월(June), 7월(July), 8월(August)달에는 돼지고기를 사고 팔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것은 돼지고기가 해롭다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증거라 하겠으나, 그 이유에 대한 깊은 지식 없이 그렇게 정했을 뿐이었다. 구라파 여러 나라들이 이달 중의 육류 매매를 장려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돼지고기를 많이 먹지 않는 것은 구라파인들만이 아니라 한국 사람들도 그렇고 이웃 일본에서도 돼지고기를 비교적 적게 먹는 사람이 많다.

-고기의 실험

나이가 같은 돼지, 양, 소의 고기를 각각 햇빛에 놓고 볼 때 돼지고기가 먼저 썩고 다음이 양고기고 쇠고기가 맨 나중에 썩는다. 그 시간 차이는 약 1시간 씩이다. 쇠고기는 썩지 않고 말라버리는 수도 있다. 그리고 후라이판에 이 3가지 고기를 넣고 요리를 만들면 돼지고기가 제일 나중에 익는다. 

뿐만 아니라 익은 돼지고기에 해로운 병균이 있는지 보증할 수가 없다. 의학적 연구 결과에 의하면 양고기와 쇠고기는 사람의 뱃속에서 소화되는 시간이 3시간이 걸리고 돼지고기는 4시간이 걸린다.

사람이 음식을 입에 넣기 전에 음식물을 구별하는 방법을 여러모로 가르치고 있다.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본능적으로 음식을 구별할 줄 모른다. 그래서 영양학의 수준이 가장 낮다.

일반 동물은 취각을 이용할 줄 안다. 인간을 취각이 매우 발달해 있으므로 이를 활용해야 마땅하다.

식물 중에는 먹을 수 있는 것이 많다. 약초도 있고 독초도 있다. 고기도 사람에게 해로운 고기가 있는 것이다. 돼지고기도 말하자면 사람을 즉사시킬 정도로 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독소가 잠재해 있다는 것은 고령의 과학자들이 증명한 바 있다. 

돼지고기는 다른 고기만큼 자양분이 많지 않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병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리라. ―”중국 사람은 먼 옛날부터 오랜 세대 동안 돼지고기를 먹어왔다. 돼지고기는 국민의 양식이며 돼지고기를 먹고 살아 왔어도 세계에서 인구가 제일 많다”고 그러나 중국 국민은 부득이 채식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국 총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은 돼지고기를 1년에 한 3번 정도밖에 먹지 못한다. 그 세 번이란 설날, 단오절, 추석이다. 그러니까 과거의 중국 농민은 1년에 돼지고기 3근 밖엔 먹지를 못했었다. 그것도 현재의 공산치하에서는 1년에 1근을 넘지 못하고 있다. 

중국 사람이 주식물의 하나가 두부다. 파, 마늘은 북부 중국인의 건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돼지고기가 중국 사람들의 주식물의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매일 먹는 음식은 아니다. 중국 사람은 돼지와 돼지고기에서 전염되는 질병에 걸려있다고 말하는 의사들의 보고는 진실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바뀌어졌다. 중국인은 무지해서 돼지고기를 먹어 왔었으나 현대과학은 돼지고

기가 비위생적이라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음식물을 바꿔야 할 일이다.

중국 무슬림가 비무슬림(비교도), 중국인을 비교해 보면 무슬림이 귀가 2인치 크고 훨씬 건강하다.

비교도 중국인들이 일찍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딴 고기를 먹어 왔더라면 오늘날의 그들 육체적 조건이 타민족 보다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며 수신재가치국평천하의 가르침을 성취하였을 것이다.

독자들이 “이슬람은 왜 돼지고기를 금하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실예를 읽고도 아직도 속이 후련하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 말할 길이 없겠으나 다음의 쿠란 구절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야담이지만 한국 동란 때 우리나라에 주둔했던 토이기 군인들(이슬람 교도였다)은 유엔군에서 받은 보급품 속에서 돼지고기 통조림은 땅을 파고 묻어 버렸다고 한다.


9 . 무슬림은 교리에 복종한다

무슬림이 자신을 무슬림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무슬림은 쿠란과 “무함마드의 어록을 성실하게 믿기 때문이다. 쿠란에 신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오! 인간이어, 땅위에 있는 것 중에서 먹어도 되는 깨끗한 것을 먹도록 하라. 그리고 사탄의 발자취를 밟지 말도록 하라. 진실로 사탄은 너희의 공공연한 적이니라.”(쿠란 2:68)

“알라께서 너희에게 먹지 말도록 금하는 것은 사육(죽은 짐승의 고기), 피, 돼지고기와 잡을 때 알라의 이름으로 잡지 않고 다른 이름을 부르고 잡은 것뿐이니라.

그러나 먹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먹은 게 아니라던가 알라(하나님)에게 죄지을 생각으로 먹은 게 아니라, 할 수 없어서 먹었을 경우에는 죄가 되지 않느니라.”(쿠―란 2:173)

이 쿠―란 구절은 조물주(알라)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모든 무슬림은 이에 무조건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무슬림이 교리에 복종함은 군인이 군에 무조건 복종하여 국법에 순종함과 같은 것이다.

이 쿠―란 구절에 “할 수 없이 먹었을 경우에는”이라는 말씀이 있다. 즉 다시 말해서 기아상태에 있을 때 돼지고기이외의 다른 음식물이 없을 시 이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돼지고기를 먹도록 총칼로 위협을 한다면 불가피 이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슬림이 우상숭배를 강요당했을 경우 무슬림은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무슬림이 자존심을 버리고 돼지고기를 먹는다면 그는 주의주장의 신념이 없는 가치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한 무슬림은 파렴치하고 죄 많은 무슬림이 되는 것이다.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돼지고기를 먹는 무슬림을 경멸하다.)

무슬림이 할 수 없이 강제에 못 이겨 돼지고기를 먹었을 때는 죄가 되지 않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 돼지고기를 먹으면서도 무슬림이라 자처하는 사람은 큰 죄를 짓고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힌두교도들이 쇠고기를 먹지 않는 것과 무슬림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그 성질이 다른 것이다. 힌두교도는 소를 신성시 하지만 무슬림은 돼지를 멸시한다.

내가 1943년 12월과 1967년 10월 가족과 함께 “칼캇타”에가 있을 때 “벵갈” 지방에서 수 천명의 피난민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것을 내 눈으로 본 일이 있는데 수많은 피난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한편에는 임자 없는 성우(聖牛)들이 거리와 언덕을 메우고 있었다. 성우들도 아사지경이었다. 

(1967년도 인도에는 늙은 소의 수효가 9,400만 마리였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소에 손을 댈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고, 소를 잡아서 인명을 살리거나 최소한 소를 팔아서 쌀이나 밀을 사들이자고 제창하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전 세계 소의 ¼이 인도에 있다 한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이슬람교만이 아니라 유태교에서도 먹지 않는다.

쿠란 구절의 “땅 위에 있는 것 중에서 먹어도 되는 깨끗한 것을 먹도록 하라”외 “사탄의 발자취를 밟지 않도록 하라”는 두 구절은 전연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느껴지리라. 그러나 이 두 구절을 심사숙고하면 두 구절의 깊은 뜻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자연이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취하는 것을 마시지 말라. 하는 쿠란 구절은 내적 표현인 동시에 외적 표현인 것이다. 이 양면표현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는 각자 읽는 이에 달렸다.

회의에 대하여 예언자 무함마드(P.B.U.H)은 이렇게 말했다. 

:”합법성 여부에 대하여 회의를 품게 될 땐 너의 내부의 소리에 물어보라.
“이것은 인간의 양심이 합법적인 것과 불법적인 것을 구별한다는 뜻이다. 

무슬림은 쿠란이 조물주의 말씀임을 공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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